기상 관측 역사에 강렬한 숫자를 남긴 해, 1994년.
그 해에 은희는 중2였다. 대치동의 아파트, 부모님의 떡집, 학교, 학원. 1994년 은희의 세상은 그곳에 있었다.
가족과 친구, 선생님, 남자 친구, 후배. 은희의 세상은 그들과 연결돼 있었다.
내가 이 영화를 은희 또래 나이나 20대쯤 봤다면 어땠을까?
나이 앞에 4자를 붙이고 나서 보니 조금은 달라진 눈으로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다 따로 살아야 할 것 같은 가족들이 왜 한 식탁에 모여 밥을 먹는지. 친구는 왜 고자질을 했고 선생님은 왜 갑자기
학원을 그만두었는지......
영지 선생님은 첫 수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機人)
얼굴을 아는 사람들 중에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사람 마음을 안 다라......
내가 살아온 날들을 앞으로 더 살게 돼도 사람 마음을 온전히 알게 되는 날이 올 거 같지는 않다.
다만 이해하려는 거뿐이다. 나도 내 사정을 다 말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을 때가 있는 것처럼,
그 사람도 그런 거겠지 하고.
은희와 가족들은 저마다의 울음을 안고 산다.
문득 당혹스럽게 그 울음들을 보게 된 은희는 그날의 눈물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병원에서 목놓아 울던 아빠, 밥 먹다 말고 우는 오빠, 두려움에 떨며 우는 언니......
2019년 은희는 지금 40살의 여성이다. 은희도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방학이 끝나면 모두 다 얘기해 주겠다는 선생님은 없지만, 은희는 스스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
당신의 기억 속에는 아버지의 눈물이 있는가? 나는 내 아버지의 울음을 본 기억이 없다. 내 아버지도 울고 싶은 날들이 있었겠지. 이제 손에 닿을 듯 말 듯 한 눈물을 생각해 본다. 마흔 살의 은희도 떠올려보겠지.....
벌새는 몸집이 참 작다. 꽃의 꿀을 빨기 위해 쉴 새 없이 날갯짓을 한다. 영화를 보며 그 날갯짓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벌새의 날갯짓의 진동에서 사람들이 우는 울음의 떨림을 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 모두 저마다 작게 떨고 있다.
1994년 그 후... 다음 해엔 백화점이 무너졌다.
6년 뒤, 어렸을 때 헤어졌던 가족들이 백발의 노인이 되어 다시 만났다.
8년 뒤, 한국 축구 대표팀이 4강에 올랐다.
20년 뒤,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이 깊고도 차가운 바다에 잠들었다.
세상은 여전히 이상한 일들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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