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예술

고통을 예술로, 뭉크

기괴한샌님 2020. 3. 21. 10:00

에드바르 뭉크

뭉크(Edvard Munch)의 생애

1863. 12. 12 ~ 1944. 1. 23

1863년 노르웨이의 뢰텐에서 군의관이었던 아버지와 미술적 재능을 가진 어머니 사이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뭉크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5세)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결핵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의 누나 소피와 남동생 안드레아스도 죽음으로 몰고 갔다. 뭉크가 성장기에 겪은 이런 가족과의 이별, 죽음 그에 따른 고통은 그의 작품의 주요 주제가 된다. 뭉크 역시 건강한 체질은 아니어서 잔병을 여러 차례 앓았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아버지는 조금씩 불안정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가끔 스트레스를 아이들에게 풀기도 했다. 후에 뭉크는 그의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의 아버지는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이었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나는 광기의 씨앗을 물려받았다. 공포, 슬픔 그리고 죽음의 천사는 내가 태어나던 날로부터 나의 옆에 서 있었다."

1864년 크리스티아나(현재의 오슬로)로 이사를 했는데 가정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이사를 자주 다녔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 처한 뭉크에게 유일한 기쁨은 그림 그리기였다. 주로 집안의 모습, 약병 같은 대상들을 그렸다.

1879년 아버지의 바람대로 기술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그만두고 바로 다음 해인 1880년 크리스티아나 왕립 드로잉 아카데미에 들어간다. 학교는 보수적이었고 젊은 뭉크와는 맞지 않았다. 아카데미를 나오고서는 도심에 있는 풀토스텐 스튜디오에 작업실을 마련한다.

1883년에는 크리스티아나 산업 미술전에 작품 전시를 하며 화가로서의 뭉크의 삶이 시작된다. 이 시기에 뭉크는 화가 프리츠 탈로를 만난다. 탈로는 뭉크의 재능을 높이 샀다. 탈로는 뭉크의 작품을 구매하기도 하고, 특히 예술이 살아 숨 쉬는 파리에 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파리에 있는 동안 뭉크는 자신만의 미술 세계를 구축한다.

1885년 밀리 탈로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후원자였던 프리츠 탈로의 형수였다. 뭉크는 그녀에게 순정적이었지만 밀리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몇 년 동안 그녀와 사귀면서 뭉크는 질투와 의심 같은 불안한 마음에 힘들어했다.

한편 크리스티아나 보헤미안 그룹에 있는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특히 그룹의 리더였던 한스 예거와의 만남은 뭉크에게 특별했다. 예거를 만나면서 뭉크는 자신의 심리와 생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때 받은 영감은 그의 작품 동기가 되었다.

1889년 4월 개인전을 열었고, 이 덕분에 받은 장학금으로 파리 유학을 갈 수 있었다. 파리의 레옹 보나 스튜디오에 들어갔지만 몇 달 다닌 것이 고작이었다. 파리에서 뭉크를 사로잡았던 것은 폴 고갱, 반 고흐 등의 작품이었다.

1890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뭉크는 깊은 실의에 빠진다.

1892년 베를린 미술협회의 초청을 받고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크게 실패하고 만다. 독일 언론은 그의 작품에 혹평을 쏟아냈고, 그의 전시회는 며칠 만에 문을 닫는다. 이 사건이 이른바 '뭉크 스캔들'이다. 하지만 이 일로 뭉크는 유명 인사(어떤 의미로든)가 된다.

1893년 <절규>를 그린다. 그의 작품 중 제일 유명한 그림이 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자신 안에 있는 고통을 표현했다. 그림의 주인공은 얼굴을 감싼 채 소리를 지르고 있다. 뭉크는 이 작품을 수십 번 변형해서 그렸는데 이 작품에 대한 그의 애정을 볼 수 있다.

1888년부터 30년 넘게 뭉크는 <생의 프리즈>라는 연작을 그렸는데, 1902년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고 발표한다. 이 연작에 포함된 그림은 <마돈나>, <흡혈귀>, <절규> 등이다.

서른 중반 무렵, 알코올 중독과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뭉크는 병원에 얼마간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다. 증세가 차츰 좋아진 이후의 작품들은 이전보다 밝아졌다.

후에 뭉크는 에켈리에서 저택을 구매하고 남은 생을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보낸다. 그림뿐만 아니라 판화도 많이 제작하였다.

1944년 80세의 나이로 타계한다. 그는 그의 모든 작품을 시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작품들은 모두 1,100여 점, 판화 18,000여 점, 드로잉과 수채화 4,500여 점 등 실로 엄청난 양이었다.

 

뭉크의 작품

절규, 1893

<절규>

뭉크의 수많은 작품들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이다. 아마 화가 이름은 몰라도 유령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의 모습은 많이들 알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화가 자신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겪는 불안과 고통이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절규하는 사람을 뭉크는 곡선의 형태로 왜곡시켜 더욱더 그림의 주제를 부각시켰다.

뭉크의 삶은 편하지 못했다. 허약 체질로 태어난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가 결핵을 앓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아들에게 하나의 두려움이었다. 어머니와 가족들의 죽음, 슬픔 등은 그의 그림 주제 요소였다. 후에 그는 이 작품을 모사하면서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것이었다."라고 적었다. 뭉크의 실제 삶을 몰라도 이 그림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며 작품을 완성했는지 느낄 수 있다.

 

살인녀, 1906

<살인녀>

1899년 뭉크는 툴라 라르센이라는 4살 연상의 여성을 만난다. 상류층이면서 예술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툴라와의 만남은 그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툴라는 적극적으로 뭉크에게 결혼을 요구했지만 그는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떠난다. 하지만 툴라는 아프다는 핑계로 뭉크를 꾀어내고는 결혼을 종용하며 권총으로 자살하겠다고 그를 위협하였다. 그녀를 말리는 과정에서 총알이 발사되는 일이 벌이지고 그 총알은 뭉크의 왼쪽 세 번째 손가락을 관통해버린다. 마침내 둘은 완전히 결별한다. 뭉크의 여성에 대한 혐오는 더욱 심해진다.

이 사건을 주제로 한 그림이 바로 <살인녀>이다. 후에 그린 <마라의 죽음>역시 툴라와의 악연을 그린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