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럽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
리스트(Franz Liszt)의 생애
1811년 10월 22일 헝가리 시골 마을 라이딩 태생.
리스트의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요제 하이든의 전속 음악가로 일하기도 했던 에스테르하지 공작의 집사로 일하면서 에스테르하지 궁정 음악가들과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다. 굉장한 음악 마니아였던 리스트의 아버지는 이들을 시골에 있는 자신의 집까지 초대해 실내악을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리스트 역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초견 등을 비롯한 여러 피아노 기법을 배울 수 있었다. 아들의 재능을 키워주려 리스트의 아버지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빈까지 가서 음악 수업을 받게 했으나 가족의 생활비 때문에 경제적으로 힘들어졌다. 이에 1820년 헝가리로 와서 리스트의 공연을 열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리스트의 음악 재능을 알아본 헝가리 귀족들의 후원 덕에 1822년 다시 빈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하게 된다.
1823년 파리로 가서 음악원에 입학하려고 하였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당시 지원자가 많이 몰렸던 피아노과에서는 외국인의 입학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음악원에 들어가지 못한 리스트는 개인 교습을 받게 된다. 그래도 연주 활동은 가능했다. 파리에서 성공적인 공연들을 마친 후에는 연주 여행을 떠난다.
1827년 16세가 되던 해, 리스트의 1호 팬이자 매니저 역할까지 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는 연주 여행을 그만두고, 파리에 머물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피아노 개인 교습 등 여러 일들을 한다. 당시 파리의 살롱은 예술가, 문학가들이 친교를 나누는 장소로 문화, 예술의 장이었다. 리스트도 살롱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쇼팽, 베를리오즈, 위고, 조르주 상드 같은 이들이었다.
다시 1829년부터는 연주 여행을 활발히 하였고, 유럽 여러 지역에서 명성을 누렸다.
1832년에는 콜레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선 공연이 열리는데,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가 주최한 것이었다. 리스트는 여기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아 피아노 기교 연습에 매진한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고난도 연주를 자랑하게 된다. 파가니니의 영항을 받아 쓴 곡 중 최초의 작품이 <작은 종에 의한 화려한 대 환상곡>(1832)인데, 이 곡이 바로 <라 캄파넬라>의 시초이다. 몇 년 후에는 6곡의 <파가니니 초절기교 연습곡>을 작곡한다.
1835년 파리의 살롱에서 알게 된 마리 다구 백작 부인과 동거를 시작한다. 그때 마리 다구 부인은 남편과 자식까지 있는 기혼녀였다. 둘의 사이는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성격 차이와 여러 가지 문제로 둘은 멀어지게 되고 1844년 완전히 결별하고 만다.
1842년에는 바이마르 궁정에서 악장직을 맡는다. 6년 후에는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 다시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한편, 이 시기는 창작 활동뿐만 아니라 직업 교사로서도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피아노 협주곡>, <전주곡>, <파우스트 교향곡> 등의 주요 작품이 이때 만들어졌다. 교사로서는 한스 폰 뷜로, 카를 타우지히 같은 인재들을 가르쳤다.
1858년 바이마르의 악장직을 그만두었다. 비트겐슈타인 부인과 정식으로 결혼하려고 했지만 좌절되고 만다. 자녀들의 죽은까지 겪게 된 리스트는 한 때 성직자의 길을 걸으려고도 했다.
1870년대 초기부터 말년까지는 클래스를 열어 로마, 바이마르, 부다페스트를 오가며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1886년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바그너 오페라를 관람한 뒤 감기 증상이 점점 심해져 혼수상태까지 빠지게 된다. 그해 7월 31일 공식 사망 원인인 폐렴으로 눈을 감는다.
음악 셀럽, 리스트
리스트는 공연을 여는 곳마다 온갖 이슈와 인기를 몰고 다녔다.
당시 음악가는 별로 사회적 존경을 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리스트는 이런 음악가의 위치를 어느 정도 올리는데 기여한 바가 있다. 리스트는 천 번 정도의 연주회를 가졌는데, 늘 성공적이었다. 공연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리스트는 아마 팬클럽을 처음으로 창시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귀부인들은 그를 지금의 연예인처럼 따랐다. 리스트의 공연이 끝나면 귀족 부인들이 무대 위로 올라가 그의 액세서리나 소지품 등을 서로 가져가려고 야단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리스트는 연주 외의 퍼포먼스도 대단했다. 피아노 뚜껑을 어느 정도 열어서 소리를 관객들에게 향하게 했는데, 이런 피아노 세팅은 현재의 공연장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독주회가 제대로 모습을 갖추는 데에도 리스트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피아노 연주회에는 피아노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같은 다른 음악이 함께 연주되는 것이 관례 같은 것이었다. 1836년 탈베르크가 파리에서 피아노만 연주하는 독주회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는데, 리스트도 이에 영감을 얻어 이듬해에 피아노 독주회를 열고 큰 인기와 성공을 얻었다.
리스트의 대표 작품
단테 교향곡, 파우스트 교향곡, 교향시 전주곡, 교향시 마제파
피아노 협주곡 제1번, 피아노 협주곡 제2번, 죽음의 무도, 헝가리 환상곡, 초절 기교 연습곡, 파가니니 대연습곡
피아노 소나타 b단조, 헝가리 랩소디